제   목 Wilhelm Richard Wagner(1813~1883)/Tannhauser overture //리하르트 바그너/탄호이저 서곡   10-04-22
글쓴이 정병구   8,533 hit
 


리하르트 바그너/탄호이저 서곡

Wilhelm Richard Wagner(1813~1883)
Tannhauser overture


Henry Victor Lesur(1860-1900)

At the Flower Market




*음악은 정확(正確)하게 계산된 질서(秩序)이며 혼돈(混沌)을 내포하는
반이성적(反理性的)이고 추상적(抽象的)인 동시에 신비(神秘)한 것이다.*

-Thomas Mann-



시(詩)와 철학(哲學)의 나라, 과학과 학문과 예술(藝術)의 나라.

독일의 시인과 철학자, 훌륭한 음악가와 많은 과학자들이
학문과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켜 인류(人類)의 삶의 질(質)을 높이며
세계의 문화 창달(暢達)에 기여한 업적(業績)은
독일인으로서는 참으로 자랑스럽고, 자부심(自負心)을 가질 수 있겠다.

그러나 독일 사람들의 선거(選擧)를 통해
집권한 Adolf Hitler(1889~1945)가
인류 역사에 끼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행악(行惡)을,
부헨발트(Buchenwald)나 아우슈비츠(Auschwitz)의
학살(虐殺)현장에서 울려 펴진 Beethoven과 Wagner의 음악을,
문명국가(文明國家)인 독일 사람들의 자부심(自負心)으로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Wagner는 게르만 설화(說話)와 신화를 소재로 하여
많은 명곡을 작곡하며 낭만주의 전통(傳統)을 계승(繼承)했다.
그는 오페라 대본을 손수 썼고 많은 저서(著書)를 출간한
학자이며, 작가이며 불후(不朽)의 명곡들을 작곡한 대 음악가이었다.

또한 Wagner는 흥미로운 게르만 설화와 신화의 세계를
감정에 호소(呼訴)하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표현하며,
유럽의 대형 오페라의 전통(傳統)에 따라
화려하고 선정적(煽情的)인 무대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

열두 살(1901년)의 Adolf Hitler(1889~1945)는 린츠에서
Wagner의 오페라를 처음 접하며 감격(感激)의 눈물을 흘렸다.
그 후 Wagner의 음악에 심취(深醉)한 Hitler는
Wagner를 자신의 우상(偶像)으로 삼고
예술가(藝術家)가 되기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Adolf Hitler는 Wagner에게서 음악과 인기 비결만을
배운 것이 아니라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人種主義) 등,
정치사상에 핵심(核心)을 이루는
상당 부분을 Wagner에게서 받아들였다.

또한 Adolf Hitler 가 많은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어
정치적으로 크게 부상(浮上)하던 과정(過程)에서
Wagner 오페라의 특성들과 유사(類似)한 요소들을 발견한다.

Adolf Hitler 가 집권한 후 이미 타계(他界)한
Wagner는 국민예술가(國民藝術家)로 추앙(推仰)받았고,
바이로이트(Bayreuth)는 나치 독일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Wagner와 Adolf Hitler 이 두 사람은
낭만주의적(浪漫主義的)인 성향도 비슷했고
비천(卑賤)한 자리에서 인간이 성취(成就)하고
도달(到達)할 수 있는 최고(最高)의 지위에 올랐다.
꿈처럼 동화(童話)처럼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들의 젊은 날의 소망(所望)은 이루어 졌다.

*

Adolf Hitler시대가 지난 후 Wagner는
실각(失脚)한 전범(戰犯)인 Adolf Hitler 와 함께 저주(咀呪)를 받게 된다.

본인의 의사(意思)와 관계없이 사후(死後)에 일어난 일을
Wagner에게 그 책임(責任)을 지울 수는 없으나
위험한 정치사상(政治思想)을 유포(流布)하고
지나칠 정도로 인기를 추구(追求)했던 일들과
반 유대주의와 인종차별 등의 책임은 면할 수 없겠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분야(分野)에서 인류 역사에
기여(寄與)한 독일인의 업적(業績)과, 독일의 위대(偉大)한 음악과,
Beethoven 이나 Wagner 를 거부(拒否)할 수는 없다.
이 또한 인류의 소중(所重)한 유산과
보물(寶物)을 잃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Wilhelm Richard Wagner는 Cosima Wagner의
33회 생일을 축하하기위해 작곡한 층계의 음악이라 불리는
지그프리드 목가(Siegfried Idyll)로2008. 4. 11.(797)
음악 다방에서 소개된바 있다.***

*

오페라의 거장 Wilhelm Richard Wagner는
솔직 담백하며 자신의 감정과 소신. 정치적인 신념을
여과(濾過) 없이 표현하여 항상 스캔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음악은 문학 연극과 조화를 이루는 종합 예술”이라는
이론을 펼치고, 기존의 고전주의 음악을 신랄(辛辣)하게 비판하며
급진적(急進的)인 낭만주의 음악을 주도(主導)했다.

그의 성격대로 그의 음악도 열정적이며
대담(大膽)하고 강렬한 선율이 두드러지게 표출된다.
또한 Wagner는 음악을 통하여 독일인의 우월성(優越性)을 강조했고
유대인을 증오(憎惡)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정치적인 신념(信念)을 음악으로 표현(表現)했다.
Hitler가 그와 그의 음악을 광적(狂的)으로 좋아한 이유이기도하다.

*

Wilhelm Richard Wagner는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아버지 칼 프리드리히 빌헬름 바그너(Carl Friedrich Wilhelm Wagner)와
어머니 요한네 로지네 바그너(Johanne Rosine Wagner)사이에서
9번째로 태어났고 6개월 후 아버지를 잃게 된다.

소년시절의 Wagner는 Dresden 극장에서
베버의《마탄의 사수》 의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았고
Hoffmann과 Shakespeare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며
작가와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우게 된다.

충동적이고 고집(固執)스런 Wagner는 Dresden의
성 십자가 학교와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고등학교에 재학하며
음악회에 자주 출입, 피아노와 작곡을 독학했고
이 시기에 셰익스피어와 괴테, 실러의 희곡작품들을 읽었다.

Wagner는 라이프치히 음악대학에 재학하며
토마스 학교의 음악 감독인
테오도어 바인리크(Thedor Weinlig)에게 음악기초를 공부하며
베토벤의 4중주와 교향곡 악보를 연구했다.

1833년 교향곡 C장조를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에서 연주하였고,
그해 여름 뷔르츠부르크에서 오페라 수업을 받으며
최초의 오페라《요정 Die Feen》을 작곡했고,

오페라단의 여배우 빌헬미네 플라너와 1836년 결혼한 후
셰익스피어 희곡을 소재로 2번 째 오페라
《연애 금지 Das Liebesverbot》를 작곡했다.

*

파리에서 채권자들을 피해 기거(寄居)하던 Wagner의
생활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고
파리 오페라 극장으로 진출하기 위해
프랑스 작곡가 자코모에게 추천을 받았지만 많은 난관이 있었다.
이 때 Wagner는 가난한 독일 예술가들의 마을에 거주하며
음악 잡지에 글을 쓰며 작곡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840년 불워 티턴의 소설을 소재로《리엔치 Rienzi》를,
1841년에는 저주 받아 끝없는 항해를 계속해야하는
유령선(幽靈船)의 선장에 대한 전설을 소재로
최초의 대표적 오페라《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작곡했다.

Wagner는 1842년 (29세)에 Dresden으로 돌아와
10월 20일《리엔치》를 공연했고 그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다음 해에《방황하는 네덜란드 인》을 공연한 후
Wagner는 드레스덴 궁정 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845년 10월 19일《탄호이저 Tannhäuser》를 공연했으나
반응은 냉담(冷淡)했다.

그러나 Wagner는 새로운 작품들을 통하여
오페라의 혁신적인 면모(面貌)와 그 내용들 대하여
비평가들로부터는 혹평과 반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언제나 청중들에게는 많은 인기(人氣)를 얻을 수 있었다.

*






《탄호이저 Tannhäuser》는
14세기 독일 음유시인(吟遊詩人)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의 이야기에
비너스 신화를 더하여 바그너에 의해 오페라 로 작곡되었다.


그 줄거리는

제 1막

음유시인이며 기사인 탄호이저(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는
궁정을 떠나 비너스(사랑의 여신)가 통치하는
환상(幻想)과 쾌락의 세계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떠나온 인간 세상의 향수를 잃을 수 없어
비너스의 만류와 저주를 뒤로하고
떠나왔던 궁정의 동료와 연인 곁으로 돌아온다.


제 2막

볼프람(친구)과 연인 Elisabeth는
최고의 음유시인이었던 탄호이저의 귀환을 환영한다.
이때 튀링겐의 영주(Elisabeth의 숙부)는 노래 경연을 열어
숭고한 사랑을 노래하는 우승자에게
조카딸 Elisabeth와 결혼을 시키겠다고 선포한다.

경연에서 볼프람과 음유시인들은
사랑은 정결함에 있다고 노래했고,
Tannhäuser는 관능적인 육체의 쾌락을 노래하며
이를 경험하지 않고는 사랑을 이야기 하지 말라고 반박한다.

금기시된 비너스의 쾌락을 노래한
Tannhäuser를 배덕자(背德者)로 몰아
영주는 Tannhäuser에게 로마로 참회의 순례(巡禮)를 떠나게 한다.


제 3막

볼프람은 Elisabeth를 사랑하지만,
Tannhäuser를 위해 애타게 기도하는 그녀를 보며
두 사람에게 축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교황은 순례자 탄호이저에게 자신의 지팡이에서
새싹이 돋을 때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절망에 빠져 돌아온 탄호이저는 볼프람에게
비너스의 동굴로 돌아가겠다고 절규하지만
Elisabeth는 그에게 용서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한다.

Tannhäuser 앞에 Elisabeth의 시신이 실려 나오며
Tannhäuser도 그 위에 숨을 거둔다.

멀리 교황의 지팡이에 새싹이 돋아났고
이를 기뻐하며 알리는 합창이 들린다.

*








Tannhauser overture







3부분으로 구성된 이 서곡은 관능적인
베누스베르크의 세계가 펼쳐지고 전 후에
경건(敬虔)한 순례자(巡禮者)들의 합창이 열린다.

서곡의 제 1부는 Andante Maestoso E장조 3/4박자로
장엄하고 경건한 관악기들의 연주에 이어
현악기의 연주로 주제가 반복되며 음량이
점점 증폭(增幅)되고 트럼본이 장엄하게 연주된다.

이 모티브가 반복 연주되며 사라지듯 멀어지고
목관 악기가 조용히 연주된다.

제 2부는 Allegro 2/2박자로 전환되고
베누스베르크의 요염(妖艶)한 세계가 펼쳐지며
비올라의 환락의 동기가 연주된다.

이어 목관악기의 시레네의 부르는 소리가 연주,
다시 처음 빠르기로 현악기의 베누스 찬가가 힘차게 연주된다.

첼로, 바이올린, 클라리넷의 연주로
베누스의 동기가 표출되고
이어서 유혹(誘惑)의 동기가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며
고조되는 음악이 베누스베르크의 세계와 조용히 멀어진다.

제 3부로 이어지는 관악기의 순례의 합창이
힘차고 장엄(莊嚴)하게 연주되며 곡이 끝난다.

*


Wagner의 작품은 베르디나 푸치니 등의
이탈리아 오페라에 비해 연주시간이 길고 규모가 크다.
이러한 Wagner의 작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의 대 편성(大 編成) 관현악곡인
서곡이나 전주곡을 듣는 것도 좋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서곡《트리스탄과 이졸데》전주곡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전주곡 《탄호이저》서곡 등
이 서곡과 전주곡들은 정교(精巧)한 구성과
낭만적이며 숭고(崇高)한 힘이 전달되는
멜로디로 오페라의 분위기(雰圍氣)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오페라《탄호이저 Tannhäuser》는
바그너의 명성을 전 유럽에 정착시킨 걸작(傑作)이며
바그너는 이 작품으로 번호 형식의
아리아 배열(配列)을 지양(止揚)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의 형식을 탈피(脫皮)하려 했다.

또한 주연(主演)의 독창이 중심이었던
오페라의 과거 전통을 초월하여
음악과 연극 무대 연출 등이 유기적(有機的)으로 통일되는
무한 선율의 새로운 작곡 기법으로
그의 작품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이 무한 선율(無限旋律)의 작곡 기법에는
필수적으로 라이트 모티브(試圖動機)가 필요하다.

Wagner의 오페라는 다양한 설화와 전설을
선택하여 이를 함축(含蓄)시켜 규모와 영역 면에서
독특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고,

시극(詩劇)으로 음악을 작곡함에
거시적(巨視的)인 구도에 능숙했고
플로트에서 결정적인 중요한 사건을 선별하여
줄거리를 단순하고 명료하게 했으며,
주로 인물의 동기 부여 과정에 많은 행위를 할애했다.

이러한 동기를 Wagner 자신은 “느낌의 반영”이라 표현했고
큰 윤곽(輪廓)을 유지하고 계속하여 주도 동기들을 발전시키며
심적인 미묘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Wagner는 음악, 연극과 언어 등 3가지 차원에서
심오(深奧)하고 복합적인 상징주의가 작용하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만들었고,
이는 Wagner의 후기 작품에서 많이 나타난다.

Wagner의 성숙기의 작품들은《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제외하고
사랑을 통한 구원이라는 한결같은 낭만적인 주제(主題)를 가지고 있다.

《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는
바그너는 독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쇼펜하우어의 염세 철학,
기독교 , 불교 등 서로 다른 사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또 다른 차원의 작품에서는 성적인 금기(禁忌),
권력 콤플렉스, 근친상간, 오이디프스 콤플렉스 등
정신 분석적(精神分析的)인 주제들을 다루며
그의 선구자적(先驅者的)이고 혁신적인 면모(面貌)를 볼 수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는
독일 낭만주의 시인들이 탐닉(耽溺)한 밤과 죽음 등의 주제에서
인생을 사악(邪惡)한 환영으로 묘사하며 쇼펜하우어 염세적인 관념,
성적인 욕망과 죽음 등 현대 심리학의 발견에 이르기 까지
상징주의적(象徵主義的)인 노선(路線)을 밟고 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자신의 악극 개념과
기존 오페라 요소들이 혼재(混在)되어 있으며
젊은이의 사랑과 기쁨, 지혜와 해학(諧謔),
젊음의 혈기와 노년의 체념과 음악 등의 주제들을
보편적인 차원에서 다루며 다른 작품들과 구별된다.

《파르지팔 Parsifal》은 바그너음악 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작품으로
인생의 고통과 회의와 상징적인 세속의 사랑과
종교적이고 아가페적인 사랑의 개념들을 환상적(幻想的)으로 묘사했다

바그너는 스스로 오페라의 대본을 집필하며
극적인 깊이와 연속성 일관성 있는 주제 등을 표출,
순수 음악 영역(領域)에서 광대한 표현 영역을 개척하며
작품마다 특이한 감정 세계를 묘사하며 이를 펼쳤고,
독일 음악의 선율 화성 양식을 발전시켜 감정적이나
감각적으로 절정(絶頂)으로 끌어올리며 변화와 확장을 꾀했다.

*


Ludwig II Neuschwanstein




당시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는
연방국가이었으나 독일의 독립을 쟁취(爭取)하기 위해
1848~1849년 Dresden 혁명이 일어났다.

이 때에 바그너는 혁명을 지지 찬양하는 수많은 글을 쓰며
드레스덴 혁명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혁명이 실패하자 Wagner에게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고
이를 피해 독일을 탈출(脫出)한 바그너는
1850년 8월 28일 친구였던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가 지휘한
자기의 작품인《로엔그린 Lohengrin》의 초연에 참석하지 못했다.

Wagner는 1858년까지 취리히에 살며
작곡과 저술(著述)로, 또한 런던 필하모니의 지휘 활동을 했고
노르웨이 신화들과 지그프리드 전설 등을 오페라 소재로 연구하며
사회적 예술적 혁명(革命)을 주제로 많은 글을 썼다.

그 중에 Wagner 악극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한
《오페라 드라마》는 악극 작업의 방대(尨大)한기초가 되었고,

여기에 1852년 3편의 시극을 추가하여
《니벨룽겐의 반지》로 제목을 지었고
이 후 완성될 4부작 악극 《라인의 황금 Das Rheingold》
《발퀴레 Die Walküre》《지크프리트 Siegfried》
《신들의 황혼 Götterdämmerung》의 기초가 되었다.

이 4부작 《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 는
그의 성숙기 음악 양식과 작곡 기법이 표출되어 있고,
바그너가 작품세계를 통하여 사회 변혁을 열망하며
스스로의 심상을 표출한 결론이었고,
그가 추구(追究)했던 새로운 극음악의 형태로
이 후 악극(music drama)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후 일종의 시극인 Wagner의 새로운 예술 형식은
관현악과 성악이 조화를 이루어 함께 연주하며
주제 악상인 주도 동기(Leitmotiv)에 의해 구성되었다.

또한 표현적 성악 악구(樂句)로 노래하며
관현악이 음악을 전개하며 극적이며 심리적인 발전을 표현한다.

《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 에서
바그너는 이러한 개념을 실현시켜
형식적이고 양식적인 약점(弱點)들을
완전히 극복(克服)하고 이를 보완하여
구식 오페라의 형식에서 탈피, 새로운 오페라의
형식을 정립하며 작곡가로 절정에 이르렀고
양식으로도 일관되고 심오(深奧)한 경지에 올랐다.

Wagner는 1857년까지 리스트의 교향시 등으로
화성적 미묘(微妙)함에 영향을 받은 상태로
《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의
완성을 미룰 정도로 작곡이 부진(不振)해 졌다.

Wagner는 부진해진 《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의 작곡을 미루고
다른 작품의 작곡을 시작했다.

그의 낙관적인 사회철학은 쇼펜하우어의 영향으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며
염세론적(厭世論的)인 비관주의로 후퇴하며 이 시기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1857~59)를 발표했다.

이 작품의 작곡 동기는 마틸데 베젠동크
(후견인 베젠동크의 아내)에 대한 불륜적(不倫的)인 사랑이었고
이로 인해 Wagner는 아내 미나와 이혼하는 계기가 되었다.


*


Henry Victor Lesur(1860-1900)
The flower Seller Tuileries



1860년 바그너는 개정판《탄호이저》를 공연했고
1861년 특별 사면(赦免)으로 고국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빈에서 《로엔그린 Lohengrin》의 공연을
처음 들을 수 있었고 지휘자(指揮者)로 여행하며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의 공연을 준비했다.

Wagner는 무절제한 낭비벽(浪費癖)으로 궁핍했고
다시 빈에서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다.

절망 속에 한계에 다다른 Wagner에게
평소 바그너 예술을 흠모하며 그를 찬양하던
루트비히(Ludwig) 2세가 후원자(後援者)로 나타났다.

루트비히(Ludwig) 2세B>는 1864년 18세의 나이로
바이에른의 왕위에 올랐고 궁핍(窮乏)했던 바그너의
음악 인생을 꽃 피우는데 결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바그너를 향한 Ludwig 왕의 우정은 변함없이 지속되었고
궁핍한 바그너에게 루체르네 호반 트리브셴에
기거할 주택도 마련해 주었다.

1869년 《니벨룽겐의 반지》4부작을 시작할 즈음
바그너는 거의 세상과 인연(因緣)을 끊고 있었다.

드디어 전곡의 작곡이 끝났고
Ludwig 왕과 뮌헨에서 초연하기로 약속했지만
바그너는 4부작의 <니벨룽겐의 반지》의 공연을 위하여
새로운 극장을 건축(建築)하기로 계획했다.

Wagner는 바이에른의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Bayreuth)에
극장을 건설하기 위해 협회를 만들어 기금을 모았고,
Ludwig 왕의 상당한 건축비의 지원을 받아
1874년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은 완공되었으며
Wagner 스스로 반프리트(Wahnfried 환상의 집)로 명명했다.

1876년 8월 13,14일과 16,17일 4일 동안
Wahnfried 축제 극장에서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의 역사적인 초연이 이루어졌다.

그 후 바그너는 여생(餘生)을 반프리트에서 지내며
마지막 작품인 《파르지팔 Parsifal》 을 작곡했고(1882년 초연)
1865년에 바그너의 자서전《나의 생애 Mein Leben》를
집필(執筆)하여 아내인 Cosima Wagner에게 헌정(獻呈)했다.

파란만장한 바그너의 음악인생은
그의 명성이 절정(絶頂)에 다다르던 시기에 심장병으로 타계하여
자신이 준비한 반프리트(Wahnfried)의 정원(庭園) 묘에 잠들었다.



주요 작품으로


《사랑의 금지 Das Liebesverbot》 (1834-1836)
《요정들 Die Feen 》 (1833-1834) 《리엔치 Lienzi 》 (1838-1840)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1843)·
《탄호이저 Tannhäuser》(1845) 《로엔그린 Lohengrin》(1850)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1867)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1865),
《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1869~76)
《라인의 황금 Das Rheingold》《발퀴레 Die Walküre》
《지크프리트 Siegfried 》《신들의 황혼 Götterdämmerung》
《파르지팔 Parsifal》 (1877-1882) 등의 오페라와
교향곡, 성악곡, 관현악곡, 독주곡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저술한 책


《예술과 혁명 Die Kunst und die Revolution》
《미래의 예술 작품 Das Kunstwerk der Zukunft》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 Eine Mitteilung an meine Freunde》
《오페라와 드라마 Oper und Drama》
《독일음악론》(1840) 《독일예술과 독일정치》(1868) 등이 있다.

*





Henry Victor Lesur(1860-1900)
The flower Sel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