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강남좌파 김정희 - 추사코드   16-05-25
글쓴이 이덕은   1,815 hit
 

추사를 말할 때 먼저 나오는 건 '(그도) 한 때는 남부럽지 않은 명문가 귀족이었다' 입니다.

결국 대부분의 삶을 힘들게 살았다는 얘기에 다름이 아니지요.

추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는 영조의 딸이고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도 정순왕후와 

9촌간이니 명문가임에 틀림없는데 왜 추사는 강남좌파가 되어야만 했을까요?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이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하고서도 홍천현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때문이었는데 나이 40에 현직 현감이 급제를 하였으나, 이제서야 왕실은

눈치보지 않고 김노경에게 중책을 맡겨 덕분에 젊은 추사도 연경길에 나서 

추사가 일약 국제적인 명사가 될 토대를 닦게 된 것이지요.


순조 27년(1827) 왕은 열아홉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는데 이때 왕세자의 

스승이자 홍문관부교리에 불과했던 추사를 불과 반년만에 예조참의로 품계를 올려주니

졸지에 스타덤에 오른 격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안동 김씨 가문의 손발격인 조봉진과 심상규를 탄핵하고, 평안감사로 

부임해가던 김유근 행렬이 피격을 당하자 그 배후로 추사가 지목됩니다.

김유근은 순원왕후의 오라버니이자 왕세자의 외숙이니 당장에 변고는 없어도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꼴이니 이후 사정이야 뻔하지요.


아무리 명문집안이라 하더라도 권력실세의 눈밖에 나면 몰락하게 된다는 걸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지금 현재도 우리가 쉽게 볼 수 있지요.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여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최고가는 반찬이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최고가는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 딸과 손자'로

해석하고 그 뒤에 '소박하고 욕심없고 꾸밈없는 순후함이 가득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글씨 또한 오래동안 연마한 연륜을 느끼게 하는 書의 졸(拙)함이 배어나옵니다.'라는 식의

평을 붙여도 될까요?


이 대련뿐만 아니라 추사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이런 식인데, 

형식을 파괴한 자유분방함과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추사체가 우리들에게 주는 긴장감이 

내용으로 가면 스러져 버리는 이유가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그러니 서법에 있어서 기교니 개성이니 평은 많이 있지만 내용을 논할 게 

별로 없으니 위와 같이 상장처럼 이름만 다르고 같은 내용의 평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럴듯한 평을 해줄래도 도무지 속내를 알 길이 없으니 그저,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라고 말할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추사코드>란 책의 서평이 실렸습니다.

저에게 낯선 이성현이라는 작가가 펴낸 책이었는데, 추사는 '예술가가 아니라

정치가'라는 도발적인 주장이 눈을 끌었습니다.

난해하고도 독특한 서체를 구사함으로 그의 예술세계가 후대에 윗글과 같이

애매하게 묘사되는 걸 알지만 그래도 예술가가 아니라 정치가라니...?


이 책에 추사 나이 서른 되던 해에 여든 셋의 옹방강이 보내온 편지 담계적독(覃溪赤牘)

전면에 추사가 쓴 찬문(讚文)이 소개됩니다.

핵실재서 궁리재심 (覈實在書 窮理在心) 고고증금 산해숭심 (攷古證今 山海崇心)


추사가 금석학, 고증학, 경학, 불교의 선(禪)지식 등 각 분야에서 그 시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심오한 학식의 경지에 있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찬문을

"사실을 밝히는 것은 책에 있고, 이치를 따지는 것은 마음에 있는데,

옛날을 살펴 지금을 증명하니 산과 바다처럼 깊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당연지사라 하겠지요.

금석학으로부터 출발한 전서, 예서가 만년에 새로운 경지의 추사체로 나타났다 라고

마치 온고지신처럼, 범생이처럼 그냥 쉽게 해석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자는 "핵실재서 궁리재심은 '옛 경서의 뜻을 헤아려 밝은 이치를 얻으려 하나,

경서에 담긴 본뜻을 입증하는 일은 (고고증금) 경서를 산과 같이 높게 받들자 해도

성인의 말씀과 자신 사이엔 바다와 같이 깊은 물(시간상의 간극)이 있어 어렵다"며

고증학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 것은 '...조선은 주자의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는데, 

추사는 조선의 성리학자에게 "(옛 경서에 의하면) 공자께서는 그리 말씀하신 적이 없다."

는 것을 증명하고자 해서 고증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알던 서체와는 다른 받아들이기 힘든 서체를 쓰는데도 청에서도 알아주는 

명필이니 가볍게 볼 수도 없고, 천재라고는 하지만 오만함이 눈에 가시처럼 거슬리는데 

그뜻을 알았다면 대역죄로 국문을 하지 추사를 가만히 놓아두었겠습니까?




그러니 말년까지도 '소박한 밥상과 단란한 가정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대팽두부과강채 대회부처아녀손)'이라 해도 그저 늙은이 넋두리나 이제야 철이 

드는 모양이라고 아무도 눈여겨보지도 않았겠지요.

그래서 세상을 마치기 하루 전날까지도 <판전> 편액 글씨를 남길 수 있었을 겁니다.


그 <판전>의 평도  ' 글씨는 최말년 작품임을 나타내듯 고졸하고 어색해 보이나, 

추사의 노숙한 신필의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식의 애매한 해설을 붙일 수밖에 없지만...

또 나오니까 지겹지요? 추사 작품 해설에 고졸미(古拙美)는 거의 모두 들어 갑니다. 

금석학의 대가니 당연하다는 뜻일까요? 

추사의 작품을 평하는데 고졸하다는 건 마치 아무 생각없이 한옥의 지붕선이 

뒷산과 닮았다고 그럴 듯해서 하나 집어 넣는 것처럼 무책임한 평입니다.


하여간 다빈치코드 영화를 연상시켜주듯 저자의 해박한 지식은 추사 작품 하나하나

우리 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로 긴박감 있게 안내해줍니다.


산숭해심 유천희해 (山崇海深 遊天戱海)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노닌다.'


"(그렇게 해석한 후) 추사의 웅휘장엄(雄輝莊嚴)한 필체를 보고 있자면 어딘지 맥빠진

느낌이 들지 않는지? 특별할 것 없는 상투적 글귀를 담기엔 작품이 너무 크고

글씨 또한 범상치 않은 것이 쓸데없이 헛심쓰다 방귀 새는 형국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추사는 위의 예처럼 실(室)이라는 글자도 형태를 달리하여 글자마다 다른 뜻을 

지니게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저로선 감히 흉내내기기조차 힘들 정도의 내공으로 추사의 의중을 헤아려

산숭해심 유천희해를 

"나라의(山)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서양 이양선의 접근을 막아라(崇).

우리와 다른 세상(海)의 믿음을 전하는 성경말씀(深)에

백성들이 현혹되는 위태로운 상황을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부활과 승천이란 터무니 없는 이야기로 백성을 현혹시키는 천주교의 포교를

 허락하라고 조선 연안에 나타나 무력시위를 벌이는 서양군함의 출현은

 계속될 것이다." 감히 누가 이런 식의 해석을 짐작이나 했을까요?



저도 서각을 하며 崇山深海만을 각자했었습니다. 그땐 뒤에 유천희해가 붙는다는 것도

몰랐지만 하여간 획이 굵직하고 그림 같은 서체가 마음에 들었던 작품입니다.

제가 각자한 작품은 석파(노석) 대원군의 글씨로 추사의 글씨를 거의 그대로 

모사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지만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편 것을 보면

교유하며 정치적 이념을 공유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야 '이런 해석도 가능하겠구나, 그럴싸한데'하며 재미있게 읽겠지만

이렇게 툭 던져진 것 같은 <추사코드>를 미술계에서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닥다리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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