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김남 선생님의 \'오디오 인물 기행\'   07-08-26
글쓴이 고 명섭   6,828 hit
 
김남 오디오 인물 기행

국악음반 제작사 악당<樂黨>이반 대표 김영일

“심청이가 죽으려고 뛰어든 바닷가가 어디요?”
오래 전 그는 그런 질문을 소리하는 어떤 여자에게 물었더니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 왔다.
수소문하여 찾아간 백령도 북방에서 그 인당수 바다를 바라다보며 그는 문득 이건 아닌데,
의문이 들었다. 이 바다를 바라보며 현장에서 소리하는 사람이 왜 없을까.
왜 그런 바다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모든 심청가는 좁은 녹음스튜디오나 공연장에서만
불려지는 것일까.

그는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다. 현장에서 물결소리, 갈매기 소리, 웅성거리는 구경꾼들의
소리를 모두 집어넣어 생생한 소리판을 만들어 보자. 그러면 그 음반은 백령도의 관광
상품이 될 것이고 찾아 온 사람들이 기념으로 구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심청가의 그 작업을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악당 이반>이라는 좀 독특한 명칭의 업체는
모든 음반제작에 그런 방향을 가지고 있다. 이미 지금까지 몇 년간 그런 작업을 해왔다.
그래서 그가 펴낸 음반은 대부분 <퓨어 레코딩>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너무 자그마하게
표기가 되어 있어서 아쉽다. 클래식에서도 실황녹음본이 제법 있지만 국악에서는 전무했다.
그게 지금 악당 이반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판소리의 3요소는 소리, 북, 추임새지요. 그중 한 가지라도 빠지면 고춧가루가 빠진
김치 같아집니다. 추임새란 원래 북 치는 고수가 하는 것이지만 진짜 추임새는 관객들이
하는 것인데 대부분의 우리 음반에서는 그게 빠져 있습니다. 모두 미완성본이라는 셈이지요.”
그래서 음반만으로 우리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일까. 국악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가끔씩 판소리를 들어보고 싶어 음반을 걸어도 그 엄숙성 때문에 금방 중단되어
버린다.
“회벽을 칠한 적막한 스튜디오 안에서 무슨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그건 죽은
음악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는 그래서 녹음장비를 매고 지방의 정자나 고옥, 심지어 식당 같은 곳에서 소리를 만든다.
어느 여관에서는 방안에서 소리를 시작하자 일하는 분들이 처음에는 방밖에서 듣더니 점점
방 안으로 밀고 들어 왔다. 처음에는 고요하더니 소리가 계속되면서 탄성이 나오고 박수도
나오고 자유분방한 추임새들이 모아졌다.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다른 방에서 부르는 소리, 전화소리, 그의 음반에는 그런
사람들의 소리가 들어 있다. 살아가는 소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 게 진짜 음악 아닐까요? 왜 음악을 들으면서 숨도 못 쉴 정도로 정숙하고
엄숙하게만 앉아 있어야 할까요?.”

필자는 절대 공감이다. 그래서 사족을 달자면 재즈나 대중음악 음반은 대부분 가짜라는
생각이 인다. 재즈카페에서는 먹고 마시면서 옆 사람과 떠들어 대면서 연주를 듣는다.
나중에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그러다가 빨려 들어가게 된다. 재즈는 원래 그런,
분위기의 음악인 것이다.
그런 생태를 고려치 않고 녹음스튜디오에서 적막한 산사 분위기를 만들고 적막 속에서
연주하는 것을 음반으로 제작해 놓은 것을, 또 고요한 방안에서 혼자 오디오로 감상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뭔가 조금 잘못되어 있다는 그동안의 불만이 <악당이반>의 김영일대표를 통하여 깨끗이
해소되고 만다. 음질은 그 다음이고 첫째는 살아있는 음악을 우리가 그동안 모르는 척
해왔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음악은 고상하게 감상하지 않아도 된다. 좋은 음악은 듣다가 잠이 와야 된다는 S선생의
농담을 듣고 모두 웃었지만 확실히 우리 시대는 음악 엄숙주의에 너무 물들어져 있는 것
같다.



국악이라는 거짓 명칭

“국악이라는 뜻은 국가나 국민의 음악이라는 것인데 우리나라 국악은 국민 아무도
모르는 음악이지요.”
“물론 국가의 책임도 큽니다. 그리고 국악인들의 책임도 크고요.”
이번 인터뷰는 그동안 찾아 다녔던 기왕의 오디오인물이 아니다. 방향이 조금
달라졌지만 음반을 제작하는 녹음사를 찾아 서울 북촌이 있는 가회동으로 왔다.
창립은 7년 됐다. 정식으로 법인으로 등록한 것은 3년.
주업종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전문 음반제작이다.

처음에는 국악음반 녹음 뜬 마스터를 가지고 대 음반사를 찾아갔다. 제작 판매를
대행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해버린다.
“마스터 음반을 300개나 가지고 오다니 누구 망하게 할 작정입니까.”
울화가 치밀어 그는 직접 회사를 차려버린 것이다. 지하철 안국역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잠시 북촌 쪽으로 가다가 안국선원 앞에서 하차하면 정면에 있는
붉은 벽돌건물의 3층에 스튜디오와 사무실을 내고 있다.

그동안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지방의 차세대 명창들 위주로 상당한 분량의
음반을 제작했다.
“지금의 현존 하는 명창들은 죄송하지만 전성기를 벗어난 소리가 대부분이지요.
국가가 잘못한 겁니다. 노쇠해야 명인으로 대접하고 상을 주고, 한참 때에는 모르는 척하고”
하긴 그것이 어디 국악분야 뿐이랴. 인간사가 대부분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내일의 명창들, 고수들을 사전에 발굴하여 전성기 때에 그분들의 소리나
연주본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런데 그거 만들면 얼마나 팔립니까?”
머뭇거리던 김영일대표는 피식 웃으며 1년에 20장 정도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 국악팬 인구란 말인가.
“무슨 돈으로 이 수지맞지 않은 작업을 계속해왔습니까?”




원래 사진전문가

그는 중앙대 사진과 출신(84년 졸업)이다. 61년 서울에서 태어나고 고향이 계동인데
지금도 고향 근처에 살고 있다.
사진으로 인생의 길을 잡은 것은 부친의 영향 때문이다. 부친은 사관학교를 나와
6.25참전을 한 장성출신인데 사진에 해박한 분이었다. 엄격한 분으로 아들과도 별로
대화가 없었지만 사진을 가르쳐 주면서 많은 대화가 오갔다. 당시 부친은 라이카,
롤라이코드 등 명기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와 함께 또 오디오 마니아였다. 미국에
무관참사로 발령받아 가자마자 중고차를 살 것인가, 마란츠 앰프를 살 것인가 고민하다가
마란츠를 구입했다. 60년대 제품인 마란츠7이 지금 아들에게 양도되어 스튜디오에
자리 잡고 있다. 진공관만 몇 개 교체했을 뿐 고장 한번 없었다는 제품이 정갈한
모습으로 렉 안에서 내방객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을 좋아했지만 저장장치라는 것에 흥미가 있어서 어려서부터 녹음하는 것도
좋아했지요.”

중학생시절에 보급형의 롤라이 코드 카메라를 가지고 그는 학교 사진반에 들어갔다.
부친은 집에서 현상인화도 하는 실력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기술들을 모두
전수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모두 혼자서 하는 범위에 그친다. 어디 출품하고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찍은 것은 주로 자연풍경 위주.

10여 년 전에야 비로소 그는 첫 번째 전람회를 가졌다. 정명훈, 정명화 등 우리나라
문화예술계 인사 30여명의 초상화만을 찍은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 제대 후 그는 LA로 가서 본격적인 사진공부를 했다. 돌아와
그가 가장 많이 손댄 작업은 잡지 창간작업이다. I 메거진, 디자인하우스, 월간음악,
샘이 깊은 물 등의 사진을 전담하여 잡지 사진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밖에도 그는 사진전문가로서 광고회사들, 대기업, 공공기관, 교과서등의 사진제작
전문가로 소문이 나있다.

“사진으로 벌어서 음반제작에 다 씁니다.”
처음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당연히 그의 음반에는 작은 카다로그로 그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진작품들이 즐비하게 포함되어 있다. 아마 전세계의 모든 음반 중 이렇게
아름다운 카다로그는 흔치 않을 것이다.

“일정 때 동경에서 레코드가 서울로 10장이 오면 평양으로는 30장이 왔다고 합니다.
조부님은 그걸 사러 평양 내왕을 자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후르트벵글러, 토스카니의 음반들이 그 당시의 것들이다. 당연히 클래식을 들으며
자랐다. 국악에는 문외한이어서 라디오에서 국악이 나오면 꺼버렸다.




한순간에 빠진 국악의 매력

그랬던 국악 문외한이 일순간에 국악에 빠져버린 일이 벌어진다. 삼성출판사에서
이메진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는데 젊은 음악가들의 사진을 연재할 때의 일.
판소리의 채수정을 그때 만났다. 스튜디오에 와서 채수정이 노래를 불렀다.
단가 편시춘.

소리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마치 감전이 된 것같은 충동을 받았다. 그동안 그가
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부지기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냉정하게 작업을 했다.
간단히 하는 작업이 아니라 하루 종일 시간을 내주지 않으면 못하는 중노동이라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채수정의 노래가 시작되고 한참이 되도록 그는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우리 판소리가 이랬단 말인가. 이처럼 사람의 혼을 빼놓는 힘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그는 그날 이후 비로소 우리 국악에 눈을 뜨게 된다.
소리를 하러 가는 채수정과 함께 구례, 남원 ,해남 등을 다니면서 그는 국악의 힘을
점점 더 깊게 깨달았다. 그런 지역에 가면 아직도 아침밥을 해주는 여관이 있다. 그런
여관에 묵으면 지리산 등지로 북을 들고 들어가 몇 년간 안내려오는 친구들이 모이고
당연히 그날 밤은 소리의 대결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단순히 노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북과 소리의 한판 대결이 벌어지는 것이다. 북은 소리를 끌고 가려하고
소리는 북 없이 넘어가려 하는 처절한 경쟁이 밤을 밝히며 계속된다. 그런 것은
서울 등지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그들이 대결을 벌이는 동안 여관의 찬모, 식모들이 모여들고 2,30분 뒤에는 여관의
모든 손님들이 방안으로 들어온다. 아직도 살아있는 남도의 체험인 것이다.
사진은 찍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공중에 날려만 보내버릴 것인가, 너무나
안타까워진 그는 스위스 나그라의 릴레코드 D2를 발주하게 된다. 이 제품은 국내에
3대밖에 없는 고가의 명기다. 거기에 노이만 M149의 튜브 마이크가 우리 음색에 잘
맞는다는 평가를 받아 들여 겸비, 그 이후 전국 각지로 녹음기를 메고 다니기 시작한다.

우리 악기는 자연소재인 나무, 놋쇠 등으로 만들어져 초저역이나 초고역 악기가 없다.
대부분 목소리에 소리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노이만과 궁합이 아주 잘 맞았다. 물론
처음부터 음반제작사를 차릴 생각은 없었다. 바로 이렇게 사라져 버리는 소리가 너무
아까워 자신이래도 그걸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시작한 것이다.

퓨어 레코딩에 눈을 뜬 경우도 그럴만한 계기가 있다. 지방 명창 한 사람을 불러
올려 스튜디오에서 소리를 시켰더니 30분쯤 하다가 일어서 버렸다.
“동네 정자에서는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답답해서 못하것소.”
결국 그는 그분의 고향으로 함께 내려간다. 그 분은 도착즉시 찬 물에 밥 한
숟가락을 풀어서 먹고 나더니 암자 마루에서 하루 종일 소리의 실타래를 풀어 내놨다.
서울집중화로 문화의 생기가 사라져버린 경우인 것이다.

진도 아리랑은 진도에서 들어야 하는데 버스로 데리고 와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듣고
있다. 진정한 콘텐츠는 그 지역에서 찾아내는 것이 옳다, 그는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린 셈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라야 진정한 소리의 재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장비가 컴퓨터화되어 소프트로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해지니 어쩌면 그의 그
런 방식이 낡은 사고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줄기차게 현지 현장 녹음을
주장하는 이유는 또 있다.
“다녀보니 우리나라 참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경치도 그렇거니와 각 고장마다
소리, 산조가 면면히 살아 있더라구요. 그런데 우리는 점점 지방문화를 말살해가고
있으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그는 흥부가는 흥부의 고향인 함양에서 녹음을 했다. 소리꾼 데리고 가서 한옥을
빌려 동무들이 모여 북치고 추임새를 넣어 시종일관 실재 현장을 재현하느라고
애를 썼다. 이런 과정에서 볼 때 요즘 음반들은 하얗게 칠한 방에서 포를 떠가지고
나오는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멀리서 비행기 소리, 매미소리, 경운기 소리, 바람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아이를
부르는 할머니 소리, 개 짖고 닭 우는 소리. 그런 것이 죄다 포함된 음반은 아마
악당의 음반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간 90여명의 마스터 음반 300여개를 만들었다. 그는 흔한 믹서나 이퀄라이저도
쓰지 않는다. 마이크에서 녹음기로 들어오면 끝이다. 따라서 끊어부칠 방법이 없다.
연주자가 미스를 하지 않으려면 피나는 연습을 통하는 길 뿐이라 그걸 주문할 뿐이다.

몇 번 시켜서 짜깁기를 하는 그런 현실을 그는 통박하고 있는 거 같다.
“녹음가 잘 만나서 명반되는 거 그런 세태가 정말 싫습니다.”
예외도 물론 있다.82세의 박송희옹은 건강상 지방을 가지 못하기 때문에 스튜디오
녹음을 했다.
“지방마다 또랑광대라고 동네 고수들이 한두 명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맥이
끊어졌어요. 그것도 너무 안타깝습니다.”
“주로 학생들을 수소문합니다. 섭외를 하고 내려가는 거지요.”

한 달이면 그런 작업 때문에 절반은 지방행. 함께 다니는 직원은 그를 제외하고
3명이다. 판소리와 타악 담당 기획자, 산조, 정악 기획자, 레코딩 엔지니어.
그는 지금 산조전집을 기획 중이다.5대 판소리(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흥부가)는 나와 있는데 산조는 유파별로 정리된 것이 없어서 가야금부터 모으면
80여 점이 된다.가야금, 대금, 피리, 아쟁, 해금 등이 모두 각기 산조가 있지만
정리된 것이 없어서 필생의 과업으로 작업에 들어가 있는 중이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 고민이 많았다. 나머지 인생을 국악과 바꿀 것이냐, 사진만
할 것이냐, 2년쯤 고민하다가 부인에게 최종 결정권을 줬다.
국악이라는 다리를 한번 건너가면 다시 못 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인은 간단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과 15년을 살아봐서 잘 아는데 한번 해보거라. 다만 식구들 굶기지만 말거라.
이제 그는 그 다리를 건너 온 셈이다.

“소나타나 교향곡, 재즈들은 다 아는데 굿거리, 거문고, 가야금 소리는 분간을
못하는 국민들을 어떻게 국악의 길로 이끌어 올리느냐 ,그게 관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라디오나 음반에서는 절대로 국악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작은 방에서 실재로
하는 연주나 소리를 한번만 들으면 그대로 빠져 버린다는 것이지요. 이게 한 민족의
동질감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자극제가 되는데 한평생을 바칠까 합니다.”

-끝-

PS:
이 글을 게제하도록 메일로 보내주신 김남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